4.19 혁명 기념일, 피어라 민주주의의 꽃
여러분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요즘 학교를 가보면 국사 공부하는 학생들이 참 적습니다. 암기 과목 취급을 받아 공부하기가 어렵고, 잘 못된 교육 정책 탓에 국사보다는 점수 따기 좋은, 다른 대체 과목을 찾아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 그나마 서울대학교의 경우 국사 과목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 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저 역시 학창시절 국사를 싫어 했습니다. 시험에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순서, 혹은 발생한 년도를 적으라는 문제가 나왔고, 무슨 장군이 무슨 전쟁에서 이겼는지.. 역사적 사실에만 집중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 국사와 사회 과목이 싫어서 이공계로 온 것도 있습니다. ㅜㅜ )
▲ 2007년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 ⓒ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과서
그러한 가운데 요즘 학교에 쳐들어가서 학생들 100명을 잡아다가 "너 4.19 혁명에 대해서 설명해봐" 라고 말했을 때, 정확히 말 할 수 있는 학생이 몇명이나 될까요? 4.19 혁명에 대해서 잘 안다고 취업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연봉이 오르는 것도 아니기에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는 듯 합니다. ( 저 역시 4.19 혁명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ㅜㅜ )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사라지고, 반만년 역사에 대한 자부심, 나 자신을 알게 하는 역사적 의의들을 싹 다 잊어 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우리의 미래를 그리고자 할 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고찰입니다.
▶ 4.19 혁명이란 무엇인가
일단 저는 역사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4.19 혁명에 대해서 잘 못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오류가 발생되었을 시에는 정중한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 이렇게 저 역시 하나하나 알아 갈 수 있기 때문에 환영합니다. )
짧게 말해서 4.19 혁명은 독재 정권에 대한 반정부 혁명이었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 영구집권을 노렸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 시키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항쟁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주도를 해서 이뤄낸 민주화라 더욱 값진 혁명이었는데요. 하나하나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 4.19 혁명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대의 사회는 상당히 암울했습니다. 전쟁 직후 피폐해진 국토에 희망이란 없어 보였습니다. 전쟁 직후 사회 기반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경제적 발전이 더딘 상태였고, 북한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의 경제적 기반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또 한 제대 군인들의 실업률 폭등으로 인해 한국 경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건은 역시 정치적 요인이었습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무리들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 초대 대통령에 대한 3선 금지 조항 폐지 등이 있었네요 )
4.19 혁명의 원인이 된 인물 중 하나인 이기붕 <출처 : 위키피디아>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라이벌이었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도중 병을 얻어, 대통령 선거 한달전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이승만은 단독 후보가 됩니다. 하지만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건재했고, 자유당은 자신들의 부통령후보인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3. 15 부정선거> 사건입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인용하자면,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다.
- 네이버 백과 中 -
이러한 부정 사건에 반발하여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시위를 진압하는 도중 경찰에 의한 실탄발포로 최소 8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실상 4.19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사건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 찾아보니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장면의 유세일이자 일요일인 이날에 당국이 학생들이 민주당의 유세장에 나가지 못 하도록 등교 지시를 내린데에 반발해 시위를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 위키 백과를 인용하자면,
당시 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 전부 공산당"이라고 한 반면,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를 쳤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 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게 된다.
그러다가 4월 11일, 마산 시위 당시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인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아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확인한 결과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부정 선거의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27일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 출처 : 위키피디아 >
그 후 4월 18일 서울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까지는 문제가 없었고, 귀교하는 도중에 유지광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정치깡패들로 부터 기습, 폭행을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화적인 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사례로 이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게 됩니다.
다음날 대학생들과 중,고등학생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위가 3. 15부정 선거와 자유당 독재에 대해 항거하여 마산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발표되었던 선언문과 동일한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뛰쳐나온 학생들은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가서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사격발포가 자행되어 수십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백명의 시위 참가인원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4.19 혁명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 현 대통령 경호실장급 )은 곡사포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려 시도했으나 곧 무너졌습니다. 시위대가 들이닥쳐 경무대의 정문을 부순 순간 군인들이 덮쳐서 또 한번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습니다.
뜻 밖의 시위대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민심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날 수 많은 학생들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대한민국에선 민주화를 위한 피의 화요일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 4.19 혁명 그 이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에 계엄령으로 맞섰지만, 잠시 주춤했을 뿐 시위는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확산되었습니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너력 할 것을 선언하였고, 4월 25일 묵묵히 뒤에서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에 참여를 하였습니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 27개 대학교수단 300여명이 국회까지 행진 시위를 벌이며 이승만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교수단 시위가 있었습니다.
학생을 중심으로 사회 전 계층으로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법무부장관 권승렬, 신임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하고 나섰습니다.
여러 사람의 설득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를 결정했으며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으로 자유당 총재직 사임을 선언했고,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4.19 혁명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한뒤 5월 29일 하외이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또 다른 인물인 이기붕은 4월 28일 가족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 4.19 혁명의 의의와 부정적인 평가
4.19 혁명의 의의와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위키 피디아를 인용하겠습니다.
혁명의 의의
김성식은 당시 《사상계》기고를 통해 4월혁명의 의의를 7가지로 제시했다.
1, 민주주의는 가열찬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만이 가치있다는 것을 경험한 점.
2, 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으로 하여금 우리민족을 높이 평가하게 하였다는 점.
3, 혁명은 부정선거가 원인이나 근본정신은 20년간 누적된 부패정치와 사회악에 대한 항거였다는 점.
4, 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 민주체제가 성립했다는 점.
5, 혁명으로 반공이데올로기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
6, 혁명으로 세계 민주운동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
7, 혁명으로 시민의 전체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동시에 한국 학생들의 정치,도덕적 갱신과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전 청와대 수석, 김정남은 4월혁명의 정신은 "반독재민주, 반외세자주,반분열통일,반기득권민중주의"라고 단언하고 이는 이승만정권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는 것으로 정권타도뿐만 아니라 향후 미래의 공동체적 이상을 제시했다면서,4월혁명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시작해야할 시원,고향이요 반드시 이루어야할 이상,목표로써 계속 진행되고 있다"했다. 4.19혁명은 민족정기이자 혼이요 생명이고 영원히 타오르는 민족의 숨결이고 정신인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4월혁명을〈낡은 것,썩은 것을 퇴치하고 4월의 봄같이 새생명이 돋아나는 세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간부의 대다수를 차지한 친일파가 썩은 것으로 이를 몰아내고,관존민비,남존여비,등 온갖 인간차별적 낡은 봉건인습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은 모든 퇴영적인 것,침울하고 억압된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혁명으로 한국인은 일종의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정신혁명'을 경험했다고 평가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이 혁명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퇴진과 이기붕에 대한 심판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가 있다.
- 위키피디아 中 -
하지만 뒤를 이은 정권이 피를 흘려가며 민주화를 이룩하고자 했던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분출을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이라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 여중생의 편지
4.19 혁명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뒤 엎었다는데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4.19 혁명 당시 희생되었던 한 학생이 어머님께 쓴 편지가 있습니다.
어머님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읍니까.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 4·19 혁명에 참여, 희생된 당시 한성여자중학교 학생, 진영숙(16세)의 마지막 편지
참.. 제 자신이 부끄러워 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요즘 학생들의 역사의식은 날이 갈 수록 암담해지는 것 같습니다. 단적으로 독도가 우리땅이지만 왜 우리땅인지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무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가서 정부와 싸우지는 않더라도, 그 정신은 마음속에 담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해야겠습니다.
공주 노인회에서 세운 4·19 혁명 기념비 < 출처 : 위키피디아 >
이번 4.19 혁명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역사, 특히 근대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공계 학생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역시를 사랑하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인식..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바른 역사의식을 전파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민주화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